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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y universe
바람 쳐불고 비 오든 간밤에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창에 젖는 빗방울 방울마다 님이 그리워서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바람소리 빗소리 물소리 속에 밤은 속절 없이 깊어만 가는데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징크스, 너는 폐허로 폐허로만 가자 한다 오라는 일도 가라는 이도 없는 술자리, 꽃자리 뜨뜻미지근한 숨 홀짝이며, 홀과 짝을 가늠하며 죽도 밥도 아닌 삶에, 죽은 삶에 골똘하다가 그만 만취(漫醉), 만취(晩翠)했다 낯선 낯을 마주하며 깨어난 한낮의 어색함으로 삶과 어깨동무하며 혼숙하는 날들이었다. 징크스, 우린 상하의가 분리된 세계를 떠나 원피스같이 완전해지고 싶다 배우지 않아도 뒷골목에서 뒷골목에서 첫 키스를 나누듯이 우리는 입영통지서처럼 불쑥 세상의 비의(秘意)를 알아챘으므로 밀정처럼 은밀히 스며들고 싶다 이인칭도 삼인칭도 될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징크스, 시간이 나뭇가지에 구름을 꿰어 행장을 꾸린다 열정이 나귀의 발굽을 가볍게 할 순 없다 낙조의 그물을 자져나가는 침묵을 본 적 없다 가없는 우주 ..
내가 살아온 것은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
지금 당장은 아닌데 꼭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
꽃잎은 이슬을 무거워 하지 않기에 새벽마다 이슬이 앉았다가 사라집니다 꽃은 낙화의 때를 기다릴 줄 알기에 해마다 눈부시게 피었다가 사라집니다 그분은 오늘도 당신 대신 못 박히러 갔기에 지금 막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이제 그만 당신은 조용히 돌아오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반하지 말라고 그분이 당신의 가난한 마음의 발을 고이 씻어드리지 않던가요 사람은 누구나 눈물과 결핍으로 만들어집니다 저와 함께 새벽 미사를 마치고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골목으로 리어카를 끌고 빈 종이박스를 주우러 다니시는 할머니의 종이박스가 되어드려요 지게에 장작을 지고 장터로 가신 아버지도 평생 장작이 무겁지 않았습니다 죽기에 참 좋은 날이 있으면 살기에도 참 좋은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과 같다. 싹이 돋아날 때도 있고, 가장 푸르를 때도 있고 붉게 물들었다가 색이 바래지고 예상치 못한 순간 바람에 흔들려 떨어질 때도 있다. 당신은 아직 색이 화려하지만 나는 바람에 날아가게 되었다. 색이 바래진 낙엽을 보면 나를 떠올려 슬퍼하겠지만 나도 당신처럼 푸르고 화려했던 모습을 기억해 주기를 나는 떠났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푸르고 화려했던 시간들은 당신 곁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시 나는 그 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시인 모든게 엉망이었을 때도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약물에 의존하려고도 가르침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잠을 자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시를 쓰는 법을 배웠다 바로 오늘 같은 밤 바로 나 같은 누군가가 읽을지도 모를 이런 시를 위해
재벌 3세가 뛰어내렸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출근한 아침 그날 하루 부산에서만 십대 세 명이 뛰어내렸다는 인터넷 오후 뉴스를 보다가 이런, 한강에 뛰어내렸다는 제자의 부음 전화를 받고 저녁 강변북로를 타고 순천향병원에 문상간다 동작대교 난간에 안경과 휴대폰을 놓고 뛰어내린 지 나흘이 지나서야 양화대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며 세 달 전 뛰어내린 애인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며 내 손을 놓지 못한 채 잘못 키웠다며 면목없다며 그을린 채 상경한 고흥 어미의 흥건했던 손아귀 학비 벌랴 군대 마치랴 십 년 동안 대학을 서성였던 동아리방에서 맨발로 먹고 자는 날이 다반사였던 졸업 전날 찹쌀콩떡을 사들고 책거리 인사를 왔던 임시취업비자로 일본 호주 등지를 떠돌다 귀국해 뭐든 해보겠다며 활짝 웃으며 예비 신고식을 했던 ..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 속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 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