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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y universe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 거지 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 거지 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 거지 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처럼, 바람 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말들에 속아 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캄캄한 그 어디에서도 지금 잡은 내 손을 놓지 마. 네가 실재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해. 우린 불편한 영혼을 공유했잖아. 우리는 미래가 닮아있으니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서 좋아. 주머니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칼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는 자해의 흔적까지. 유령처럼 하얗고 작은 발가락까지. 비릿하고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나면 온 몸에 개미 떼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너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난 차라리 다행인데. 유서를 쓸 땐 서로 번갈아가면서 쓰자. 네가 한 줄, 내가 한 줄, 이 개 같..
고단한 잠은 멀리 있고 나를 찾지 못한 잠은 누구의 호흡으로 도착해 하룻밤을 보내고 있을까 나는 아직 아름다운 운율에 대한 정의를 잠든 그의 숨소리라고 기록한다 두 눈을 꼭 감으면 잠이 올 거야, 없는 그가 다독이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두 눈을 꼭 감으면 감을수록 떠도는 별들이 동공의 어두운 웅덩이를 찾아와 유성우(流星雨)로 내렸다 밤새 유성우로 내리는 별들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면 차가운 호흡과 별들이 돌아가는 시간이 꼭 알맞았다 오랫동안 성황을 이룰, 별이름 작명소 잠을 설친 새벽이 눈뜰 때마다 검은 액자 속 한 사람과 마주쳤다 날마다 희미해지는 연습을 하는지 명도를 잃어가는 사진 한 장 별이 태어나는 차가운 먼지구름 속 아무도 그가 먼지구름에 도착했다는 안부를 전해주지 않았다 어떤 별의 소멸은 ..
너와 나는 각가 다른 형식으로 즐거워진다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오해를 하기로 한다 그게 무엇이든 곧 떠나는데 익숙하다 끄고 켜는 스위치처럼 노력하지 않는다 엄살을 떠는 환자들이 들락거리는 병실에서 조금 색깔 있는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한 시간은 인터넷을 하고 한 시간은 자살을 생각하고 손바닥 가득 수북한 알약으 수를 세다가 한 번에 몽땅 입에 털어 넣어 넣는 사내를 바라본다 오래전부터 죽고 싶었어 어떤 방식으로든 얼룩이 묻은 바지와 목발은 혀를 대롱거림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중 바닥까지의 걸음을 계산하며 커피 스타킹을 신은 다리는 변기 물 내리는 걸 잊는다 담배에 찌든 손가락은 창틀을 두들기며 소리에 귀 기울인다 우리는 접시 위 덜 구운 스테이크를 향해 단정히 침을 뱉으며 팔리지 않을 시를 읽는..
농구공이 공중에 머물렀을 때 나는 너의 시점을 잃기 시작한다 담쟁이 잎이 공중에 원을 그렸을 때 나는 너의 인칭을 잃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2분 9초의 그림자에 닿았을 때 나는 너의 시제를 살기 시작한다 너를 영원히 사랑한 적이 있다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 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내가 가도 되는데 그가 간다 그가 남아도 되는데 내가 남았다
가끔 나는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나는, 너를 떠나보낼 때 너를 가장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별은 내게 있어 사랑의 절정이었다 가장 사랑하던 그 순간, 나는 너를 놓았다 내 사랑이 가장 부풀어 오르던 그 순간이, 나는 외려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잘가라, 나는 이제 그만 살게 손을 흔들어 주진 못했지만 그 순간 너를 향한 마음이 절정이었음을 절정이 지난 다음엔 모든 게 다 내리막이었다 내 삶도, 나의 인생도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